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2 디화 정변 (문단 편집) == 배경 == 1928년 이전에 신강성을 지배하던 군벌 [[양쩡신]]은 과거 [[좌종당]]이 대거 박탈했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회족 등 무슬림 토착민들의 자치권을 복구했으며, 위구르인 봉기군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여 진압하고, 러시아 적백 내전 시기에 몰려온 [[백군]] 난민 수만명이 신장에 들어올 때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10여년 동안 안정적으로 신강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양쩡신은 국민당의 사주로 1928년 7.7 사건으로 살해되었으며 1928년 새로 집권한 [[진수런]]은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을 탄압하고 일방적인 한족 일방주의 정책으로 전환했다. 진수런은 위구르인 관리들을 해고하고 한족 관리로 교체했으며 위구르인 농민들의 농토를 무상으로 약탈해 한족 빈농들에게 분배했다. 심지어 위구르인 유력자들의 메카 성지 순례를 금지하고 위구르족의 왕공족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부족자치를 폐지했다. 이에 위구르족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진수런의 폭정에 맞섰으며 위구르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수런이 세금을 올리고 화폐를 남발하여 위구르족의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1931년, [[하미시|하미]]와 투르판에서 율바르스 칸과 호자 니야즈가 진수런에 맞선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감숙성과 청해성을 기반으로 하는 신예 군벌 [[마중잉]]이 가세하여 신강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한편 진수런은 양쩡신을 배신하고 집권했다는 한계 때문에 초기부터 신강성에서의 기반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중잉의 공격으로 계속해서 패하던 진수런은 비서 노효조(魯效祖)를 난징에 파견하여 군 전문가를 초빙하고자 했다. 이때 초빙된 인물이 국민혁명군 상교참모로 일하고 있었던 [[성스차이]]였다. 친공 성향 때문에 군부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던 성스차이는 교육 쪽에서 승진하려던 마지막 로비가 실패하자 진수런의 제안을 수락하여 신강성 독판공서 참모주임 겸 신강육군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육군군관학교에 대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진수런은 신강성에 기반이 없던 성스차이를 신임했고 신강성에서 가장 현대 군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성스차이는 신강성의 생도들을 휘어잡으며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